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생단 사건 (문단 편집) === 숙청의 격화 (출처 없음) === 처음에는 조선인 민생단 첩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숙청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첩자의 기준이 모호한 데다 무엇보다 민생단에 몸을 담았다는 물적 증거 따윈 없었다. 나중에 가면 할당량을 정하고 '''마음에 안 들면 민생단'''으로 낙인을 찍어서 [[홍위병]]과 같은 열성분자들을 동원해 민생단원이라는 죄명을 씌워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일례로 동만특위에서 선전부장 리상묵(李相默)을 훈춘현에 파견하여 반혁명숙청운동을 영도하게 했더니 리상묵은 '''훈춘당조직, 혁명정부, 유격대와 군중단체의 70%가 민생단원'''이라고 무단으로 선포하고 현위위원 오일파(吳一波) 등 구급(區級) 이상의 주요 간부 60여 명을 체포하여 영북, 영남의 3개 구류소에 감금해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갖은 흉악한 고문을 거쳐 6차에 나누어 60여 명 간부 중 한창혁 한 사람을 제외한 전부를 총살하거나 타살하였다. 그리고 지주, 부농 가정 출신인 자, 문장을 쓸 수 있는 지식인, 노간부, 과거 조선독립군과 조선공산당 당파에 참가했던 자, 공작 중에 착오가 있었던 자, 공작 표현에 이상이 있다고 보이는 자, 유격구의 생활 곤란에 불평 표현이 있었던 자, 심지어 '''식사 중에 밥알을 흘린 사람'''(식량을 낭비한 잘못)까지 모두 민생단원이라고 몰아세우면서 100여 명이나 체포, 학살하여 전체 유격근거지는 내부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야말로 '''간도판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중국공산당 문서나 일제 자료를 봐도 민생단 숙청으로 인해 희생된 조선인의 숫자가 일제 토벌에 희생된 조선인보다 더 많아졌다. 심지어 일제 문건에 따르면 진짜 민생단원은 겨우 7~8명이었다. 7~8명 색출한다고 수천여 명을 희생한 것이다. 민생단 문제 때문에 간도에는 그야말로 지옥이 열리고 말았으며 간도의 조선족 공산당의 기반은 뿌리째 흔들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